스포츠뉴스
[24-07-27 12:47:31]
여자 프로배구 현대건설 황연주가 스물한 번째 여정에 오른다.
토종 아포짓의 자존심
유독 토종(土種) 수식어가 자주 붙는 포지션이 있다. 아포짓이다. 외인 선수 등장 이후 남녀부 막론 국내 선수가 오른쪽에 서는 걸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 연유로 이런 선수가 나타나면 배구계는 흔히 '토종 아포짓의 등장'이라며 반기곤 한다. 그만큼 국내 선수가 뛰기 어려운 자리라는 얘기다. 대개 리시브 부담 없이 득점에 주력하기에 신장과 파워가 덕목처럼 우선시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프로배구 원년'부터 굳건히 토종 아포짓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온 이가 있다. 황연주다. V-리그 출범인 2005시즌 혜성처럼 나타나 신인상, 백어택상, 서브상을 휩쓸었다. 여자부에 외인 선수가 처음 입성한 2006-07시즌 이후도 끄떡없었다. 2010-11시즌 현대건설 소속으로 정규리그, 챔프전, 올스타전 MVP를 모두 석권했다. 팀에 창단 첫 통합우승을 안긴 건 덤. 2017-18시즌에는 통산 5000점 고지도 넘었다. 남녀부 통틀어 맨 처음이다. 지난 시즌엔 현대건설과 함께 13년 만에 통합우승컵을 탈환하기도 했다.
이제 황연주의 발자취는 곧 한국 프로배구의 새역사가 된다. 2023-24시즌을 끝으로 대다수 원년멤버가 코트를 떠났기 때문이다. 86년생 동갑내기 황연주와 임명옥(한국도로공사)만 남았다. 남자부는 전무(全無). 이들이 '한 번 더'를 외칠 때마다 V-리그 최다 시즌 출장 기록도 함께 경신된다.
'한 번 더'를 외친 이유
최근 현대건설은 전지훈련 차 강성형 감독의 고향인 전남 무안을 찾았다. 무안종합스포츠파크를 거점 삼아 꼬박 4박 5일을 보냈다. 어느 해 쨍쨍한 날 이곳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황연주의 이마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최선참인데도 가장 열심이다"라는 한 구단 관계자의 귀띔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때를 보다 바빠 보이는 황연주의 시간을 잠시 빌리기로 결심했다. 미안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먼저 "무안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그런지 아무리 운동해도 계속 배가 나온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금세 밝아진 분위기 속에 한참 수다가 오갔다. 그러다 불쑥 얼마 전 세차게 분 은퇴 열풍에 그도 함께 흔들리진 않았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물음표를 건네자 황연주는 느낌표로 받았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여자부 선수들은 20대 중후반만 되면 자연스레 등 떠밀리 듯 은퇴했다. 어떻게 40살까지 뛰냐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어떤가. 나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선수가 30~40대까지 코트에 오른다.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례가 많아지면 후배들도 더 긴 배구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지 않겠나.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결국 나중에 어린 선수들이 '갈 수 있는 길'이 될 거라 믿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황연주는 개인적 이유도 함께 전했다. "저번에 (임)명옥이와 그런 얘길했다. 언니들이 은퇴하니까 이제 우리 차례가 다가오는 듯싶다고. 그래서 나는 언니들이 안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웃음). 요즘 다들 은퇴 후 계획을 묻는다. 이러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은퇴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선수들이 치고 올라와 경쟁에서 밀리는 건 OK다. 그런데 단순히 '나이 먹었으니까 나가야 된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스스로 좀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라는 게 그의 말. 몸이 허락하는 한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할 수 있을까의 반복...일 년 일 년 아쉽고 소중해"
내친김에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 시즌 황연주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 옅은 미소와 함께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지난 1년을 거의 쉬다시피 했다. 경기를 안 하면 기량 하락을 떠나서 감각 자체가 떨어지는 게 있다. 그래서 팬들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을 텐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한다. 하지만 꼭 보여주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나 힘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대신 노련미가 생겼다. 순간 센스를 십분 발휘해 최선을 다하면 팬들도 응원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황연주는 자신의 배구 시곗바늘이 전보다 빠르게 돌고 있음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훈련을 하면 가끔 배구가 잘 안되는 날이 있을지언정 회복은 빨랐다. 그런데 요즘은 한 번 훈련을 하고 나면 발바닥까지도 알이 배기더라. 또 재활과 훈련을 병행하다 보니 기량을 끌어올리는 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점프를 예로 들더라도 100번 연습한 사람과 10번 연습한 사람의 높이가 다르지 않나. 날짜와 시간이 쌓여야 나오는 퍼포먼스가 있는데, 나는 그게 부족하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기량이 떨어진 것도 있겠지만, 부상이 쌓이면서 몸이 안 따라주는 것도 맞다"라고 털어놨다.
그렇기에 코트에 오르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간절하다는 게 황연주의 진심이다. "언젠가부터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배구를 해왔다. '내년에 또 할 수 있을까'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일 년 일 년이 내게는 되게 아쉽고 소중했다. 단순히 블로킹 한 번을 하고, 서브를 한 번 치더라도 코트 안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그는 다시 코트로 돌아가 굵은 땀방울을 쏟아냈다.
다가올 2024-25시즌 황연주는 한국 프로배구의 역사를 한 장 더 넘기고자 한다. 그의 스물한 번째 시즌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_한국배구연맹(KOVO), 현대건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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