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 경기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나더라. 정말 하늘의 은혜다.“

10년 전 이은혜를 대한항공에 영입한 '탁구인 출신 스포츠행정가' 이유성 우리들CC 사장(전 대한항공 스포츠단 전무)은 “대한민국 여자탁구의 파리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순간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 했다. 10년 인고의 세월을 빛나는 올림픽 메달로 보상받았다. 2008년 김경아, 당예서, 박미영의 동메달 이후 16년 만의 쾌거였다. 동메달 결정전, 신유빈-전지희 뒤 귀화 선수 이은혜(29)가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첫 단식 독일 아네트 카우프만을 3대0으로 돌려세우며 승기를 잡았고, 한국은 3대0 완승으로 동메달을 가져왔다.

인터뷰 중 눈물을 왈칵 쏟은 이은혜는 '메달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2011년 한국에 온 이후 13년의 힘겨웠던 시간, 수없이 반복됐던 경기, 고마운 이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스쳐지나더라고 했다.

'서울올림픽 여자복식 금메달 레전드' 양영자 전 청소년대표팀 감독이 그녀의 첫 스승이자 '한국엄마'다. 2011년 열여섯 살에 내몽골서 탁구의 꿈 하나로 한국에 건너왔다. 선교 사역을 하던 양영자 감독에게 발탁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양 감독은 “은혜는 세 딸 중 막내인데 한자녀 정책을 고수하는 중국에서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웠다. 대회 나갈 돈이 없었다. 한국식당을 하시는 분이 은혜를 적극 지원해주셨다. 어린 은혜는 대회 후 남은 비용을 다시 돌려드릴 만큼 반듯하고 착했다. 탁구 스타일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내몽골의 수많은 어린 탁구선수 중 가장 성실하고 누구보다 탁구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은 아이였다“고 오래 전 그날을 떠올렸다. 사역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이은혜의 부모가 귀화를 제안했고, 양 감독과 절친한 이충희 목사가 입양을 약속했다. 양 감독은 이은혜를 대한항공에도 추천했다. 2013년 입단 이후 11년간 이은혜는 대한항공에서 탁구의 꿈을 키웠다. '2008년 동메달'을 합작한 당예서와 김경아가 그녀의 스승이었다. 당예서-김경아처럼 이은혜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나선 첫 올림픽에서 '스승들의 숙원' 여자탁구의 메달을 다시 가져왔다.

동메달은 하루 아침에 그냥 찾아오지 않았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지난 10년,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았다. 대한항공 내에선 양하은, 신유빈 등 국내 유망주에게 밀려 줄곧 2인자였고, 대표팀에선 '귀화 에이스' 전지희, 최효주 등에 밀려 태극마크, 주전의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그러나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2022년 종합탁구선수권 여자단식 우승 이후 평창아시아선수권, 항저우아시안게임. 부산세계선수권에 잇달아 나서며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하더니 첫 올림픽 무대에서 마침내 '포텐'이 터졌다.

호수처럼 잔잔해 보이는 그녀 내면엔 깊은 아픔도 있었다. 양 감독은 “은혜는 4살 때부터 부모를 떠나 탁구를 했다. 한국에 온 후 문화 차이와 치열한 경쟁 속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7년간 공황장애를 앓았다. 탁구를 그만두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힘들었던 시간“이라고 돌아봤다. 힘든 순간마다 이은혜를 붙든 건 그녀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 독실한 신앙 그리고 탁구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양 감독은 “은혜가 다니는 김포하나로교회 2000여명의 교인들이 하나 된 마음으로 늘 (이)은혜를 응원하고 기도해주신다. 공황장애도 씻은 듯 사라졌다“고 했다. 이은혜는 “내가 정말 힘들어한단 걸 아빠도 아셨다. 너무 힘들면 돌아오라고 하셨다. 상태가 정말 안 좋았는데… 탁구를 너무 좋아해서, (서)효원언니와 교회 친구들, 응원해주는 이들 때문에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돌아가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같았다. 그때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 이 메달이 있다“며 웃었다.

돌아보면 기적의 연속이었다. 양영자 감독은 “사실 은혜의 동메달보다 올림픽에 나간 것이 더 큰 기적“이라고 했다. 올림픽 한 달 전만 해도 이은혜의 출전을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세계랭킹 30위 이내의 선수를 선발키로 한 상황, 서효원과 김나영이 30위권에 근접해 있었다. 그러나 30위 이내 선수는 나오지 않았고, 이은혜가 6월 23일 최종선발전 1위에 오르며 올림픽 티켓을 손에 넣었다. 대한탁구협회가 국내선수 육성을 위해 귀화선수를 1명으로 제한할 계획인 만큼 전지희 등 귀화선수 2명의 올림픽은 이번이 마지막. 그 '바늘구멍' 기회를 이은혜가 잡아냈다.

'올림픽 금메달' 스승 양영자 감독이 현장에서 애제자의 '올림픽 동메달'을 응원했다. 양 감독은 “7월27일부터 8월4일까지 파리 선교가 예정돼 있었다. 내가 이 사역을 준비할 때 은혜는 파리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없었다. 기적처럼 파리올림픽에 나가게 됐고, 내 사역이 끝난 5일부터 은혜 경기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다 계획돼 있었던 것처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며 미소 지었다.

독일전을 앞두고 이은혜와 신유빈, 전지희가 기도를 하는 장면도 화제가 됐다. 신유빈과 전지희는 무교지만 이은혜의 기도 제안에 간절하게 손을 맞잡았다. 신유빈은 “은혜언니가 기도할 때 한국어를 나보다 더 잘해서 놀랐다. 진짜 '방언'이 터졌다“며 후일담을 전했다. 이은혜는 “모든 건 내가 아닌 하늘이 한 일“이라고 했다. 양 감독도 “하늘이 은혜의 손을 붙잡고 있다고 느꼈다. 너무 자랑스럽다. 너무 잘했다“며 감격했다.

이은혜는 “원래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다. 친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파리에 오기 전 김포하나로교회 청년부 친구들이 응원 편지를 책으로 만들어줬다. 비행기서도 읽고, 동메달 결정전 전날도 이 편지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했다. '인생 경기였다'는 극찬에 이은혜는 팀에 공을 돌렸다. “우리 팀 조합이 너무 좋았다. 유빈이와 지희 언니가 복식은 무조건 이겨준다는 생각에 든든했다. 내가 져도 언니와 유빈이가 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동메달을 딴 후 내몽골의 아빠, 엄마와 통화를 했다. “아빠, 엄마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안믿어진다고….“ 10년의 분투가 2024년 여름 파리에서 눈부신 꽃을 피웠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꽃 피우는 시간이 온다. 이은혜의 올림픽 메달은 지금 죽을 듯이 힘든 터널을 견뎌내고 있는 모든 청년, 화려하지 않아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한 희망과 기적의 증거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